2026-09-21 · 한동훈 (부연구위원)

디지털 제품 여권(DPP)이란 무엇인가요? EU ESPR·배터리 여권 2027 의무화로 본 2026 기업 대응 완전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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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제품 여권(DPP)이란 무엇인가요?

디지털 제품 여권 대응의 출발점은 QR코드를 붙이는 일이 아니라 제품 데이터를 누가 어디에 보유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입니다. EU는 에코디자인 규정(ESPR)을 통해 역내에서 판매되는 제품에 내구성, 재활용 가능성, 수리 가능성, 에너지효율, 탄소·환경발자국 정보를 디지털로 제공하도록 요구하고 있고, 배터리는 2027년 2월부터 디지털 제품 여권이 의무화됩니다. 철강·철 제품이 앞서고 섬유·타이어가 2027년, 가구·화학·매트리스가 2028~2030년으로 이어지는 일정입니다. 여권을 붙이지 못한 제품은 과징금이나 역내 판매 중단 같은 제재 대상이 됩니다. 문제는 여기에 들어갈 데이터의 상당 부분이 기업 내부가 아니라 2차·3차 협력사에 흩어져 있다는 점이고, 그래서 준비 기간이 짧지 않습니다.

목차

수출 상담장에서 나온 질문 하나

지난 해 진행된 수출기업 대상 규제 설명회에서 가장 자주 나온 질문은 "QR코드를 어디에 붙이면 되느냐"였습니다.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한 중견기업 담당자가 특히 구체적이었습니다. 이미 제품마다 바코드를 붙이고 있고 생산관리시스템도 갖추고 있으니 출력 위치만 정하면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상담이 30분쯤 지났을 때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그가 만드는 부품에 들어가는 알루미늄의 재활용 원료 비율을 묻자 대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1차 협력사에 확인해야 하는데, 그 협력사도 소재를 사 오는 입장이라 원천 데이터는 다시 한 단계 위에 있었습니다. 결국 필요한 정보는 이 회사의 ERP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이 장면이 디지털 제품 여권의 본질을 잘 보여줍니다. DPP는 표시 규제가 아니라 데이터 수집 체계에 관한 규제입니다. 라벨은 결과물일 뿐이고, 실제 작업량은 공급망을 거슬러 올라가며 데이터를 모으고 검증하는 과정에 집중됩니다. 같은 자리에서 다른 기업 담당자가 던진 한마디가 정확했습니다. "이거 표시 문제가 아니라 회계 문제네요." 각 단계에서 무엇이 들어갔는지 장부처럼 기록해두지 않으면 어느 순간 계산이 맞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왜 지금 디지털 제품 여권인가요

배경에는 EU의 순환경제 전환이 있습니다. 기존 규제는 제품이 시장에 나올 때의 안전성과 성능을 주로 봤습니다. 반면 ESPR은 제품이 얼마나 오래 쓰이고, 고칠 수 있고, 다시 자원이 될 수 있는지를 규제 대상으로 끌어왔습니다. 설계 단계부터 조건을 걸고, 그 조건 충족 여부를 소비자와 재활용 사업자가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장치가 디지털 제품 여권입니다.

여기에는 시장 구조를 바꾸려는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지금까지 수리 가능성이나 재활용 원료 비율은 가격에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정보가 없으니 시장이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DPP는 이 정보를 강제로 드러내 보이지 않던 속성을 경쟁 요소로 만드는 규제입니다. 잘 준비한 기업에는 차별화 기회이고, 준비하지 못한 기업에는 진입 장벽이 됩니다.

국내 제조업에 주는 압력은 이중적입니다. EU에 직접 수출하는 기업은 물론이고, EU로 수출하는 국내 대기업에 납품하는 협력사도 데이터 제공 요구를 받게 됩니다. 실제로 2026년 들어 완성품 기업이 협력사에 소재 이력과 탄소발자국 데이터를 요구하는 사례가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규제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기업까지 사실상 범위 안에 들어오는 구조입니다.

DPP에는 무엇이 담기나요

품목마다 세부 항목은 다르지만, 공통 구조는 비슷합니다.

구성 요소내용실무 난이도
고유 식별자제품·배치·개체 단위 ID낮음. 기존 코드 체계 확장으로 대응 가능
데이터 캐리어QR코드, NFC 태그, RFID 등낮음. 부착 방식과 내구성 검토 필요
제품 기본 정보모델, 제조자, 규정 준수 정보중간. 대부분 사내 보유
소재·성분 정보재활용 원료 비율, 우려 물질 함유높음. 협력사 데이터 의존
환경 성능탄소발자국, 에너지효율, 내구성높음. 산정 방법론과 검증 필요
수리·재활용 정보분해 방법, 예비부품, 재활용 지침중간. 문서화가 안 된 경우 많음
접근 권한소비자·수리업자·당국별 열람 범위 차등중간. 영업비밀 보호 설계 필요

마지막 항목이 실무에서 자주 간과됩니다. DPP의 모든 정보가 전면 공개되는 것은 아니고, 이용 주체에 따라 볼 수 있는 범위가 달라집니다. 소비자에게는 수리·재활용 정보를, 재활용 사업자에게는 분해와 소재 정보를, 시장감시 당국에게는 규정 준수 증빙을 보여주는 식입니다. 설계 단계에서 이 권한 구조를 잡아두지 않으면 나중에 영업비밀 노출 문제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언제부터 어떤 품목에 적용되나요

가장 먼저 움직이는 것은 배터리입니다. 배터리 규정에 따른 디지털 제품 여권은 2027년 2월부터 의무화되고, 산업용·전기차용 배터리가 우선 대상입니다. ESPR 기반의 품목별 위임법은 그 뒤를 따르는 구조입니다. 현재까지 공개된 우선순위 흐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 2026년: 철강·철 제품 관련 요구사항 구체화 착수
  • 2027년: 배터리 DPP 의무 적용 시작, 섬유·의류와 타이어 후속
  • 2028~2030년: 가구, 화학제품, 매트리스 등 순차 확대

위임법이 품목별로 순차 공개되는 구조라 세부 요구사항은 시점마다 갱신됩니다. 따라서 일정표를 한 번 만들어두고 끝내기보다, 자사 품목에 해당하는 위임법 초안 공개 시점을 분기 단위로 확인하는 담당을 지정해두는 편이 안전합니다.

일정만 보면 여유가 있어 보이지만 실무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협력사 데이터 수집 체계를 새로 만드는 데 보통 12~18개월이 걸리고, 탄소발자국 산정은 방법론 확정과 검증에 추가 시간이 듭니다. 의무 적용 시점에서 2년을 빼면 착수 시점이 나옵니다. 배터리·철강 공급망에 걸쳐 있는 기업이라면 이미 준비 구간에 들어와 있다고 보는 편이 맞습니다.

배터리 여권이 먼저인 이유

배터리가 선두에 선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전기차 배터리는 수명이 끝난 뒤에도 에너지저장장치로 재사용하거나 리튬·코발트·니켈을 회수할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이 배터리가 어떻게 쓰였는지에 대한 이력이 없으면 잔여 가치를 평가할 수 없습니다. 충방전 횟수, 열 이력, 셀 구성 정보가 있어야 재사용 가능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순환경제가 실제로 돌아가려면 데이터가 먼저 있어야 한다는 구조를 배터리가 가장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이 논리는 다른 품목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섬유는 혼방 비율을 모르면 재활용 경로를 정할 수 없고, 가구는 사용된 접착제와 마감재를 모르면 분해 후 처리가 어렵습니다. 품목별 요구 항목이 달라 보여도 목적은 하나입니다.

표준은 누가 정하고 있나요

규정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정한다면, 표준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가"를 정합니다. 이 역할을 맡은 곳이 유럽표준화위원회와 유럽전기기술표준화위원회가 함께 꾸린 CEN/CLC JTC 24입니다. JTC 24는 DPP 시스템과 생태계 전반의 프레임워크를 다루고, 고유 식별자와 데이터 캐리어를 포함한 여러 작업반으로 나뉘어 표준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다만 품목별 세부 표준까지 이곳에서 만들지는 않습니다.

기술적 토대는 EU 연구개발 프로젝트인 CIRPASS와 후속 CIRPASS2에서 마련됐습니다. 데이터 모델, 상호운용성, 접근 권한 체계 같은 개념 증명이 이 프로젝트를 통해 정리됐고, 그 결과가 표준화 작업으로 넘어간 흐름입니다.

표준화 작업이 완료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대응을 미루는 기업이 많은데, 이 판단에는 위험이 있습니다. 표준이 확정되는 시점과 의무 적용 시점 사이의 간격이 데이터 수집에 필요한 기간보다 짧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표준을 기다렸다가 시작하면 물리적으로 맞추기 어려운 일정이 나온다는 뜻입니다.

기업 실무자가 여기서 읽어야 할 메시지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표준이 확정되기 전이라도 데이터 수집은 지금 시작할 수 있습니다. 소재 이력과 탄소발자국 데이터는 어떤 표준이 채택되든 필요합니다. 둘째, 특정 벤더 솔루션에 데이터를 가둬두지 않아야 합니다. 표준이 확정되면 데이터 이전이 필요해지는데, 내보내기가 어려운 구조를 선택하면 전환 비용이 크게 늘어납니다.

기업 대응 로드맵 4단계

1단계 — 적용 대상과 시점을 확정합니다

자사 제품이 ESPR 우선순위 품목군에 속하는지, 배터리 규정 적용을 받는지, EU 수출 고객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요구받을 가능성이 있는지를 나눠 정리합니다. 직접 수출이 없더라도 협력사 위치에 있다면 대응 시점은 고객사 일정에 맞춰집니다. 이 구분이 안 되면 우선순위가 잡히지 않습니다.

2단계 — 데이터 갭 분석을 수행합니다

요구 항목을 나열하고 각각에 대해 보유·부분 보유·미보유로 분류합니다. 앞서 소개한 사례처럼 사내에 없다고 판단되는 항목이 전체의 절반을 넘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미보유 항목은 다시 "1차 협력사에서 받을 수 있는 것"과 "2차 이상으로 올라가야 하는 것"으로 나눕니다. 후자가 가장 오래 걸리는 작업입니다.

3단계 — 공급망 데이터 수집 체계를 만듭니다

협력사에 요구할 데이터 양식을 표준화하고, 계약에 데이터 제공 조항을 반영합니다. 소프트웨어 공급망에서 자재명세서를 요구하는 방식과 구조가 유사하다고 보시면 이해가 빠릅니다. 초기에는 엑셀 양식으로 시작하더라도 항목 정의와 단위를 처음부터 고정해두어야 나중에 시스템으로 옮길 때 재작업이 줄어듭니다.

4단계 — 데이터 캐리어와 접근 권한을 설계합니다

QR코드나 NFC 태그의 부착 위치, 제품 수명 동안의 내구성, 훼손 시 대체 경로를 검토합니다. 동시에 소비자·수리업자·재활용 사업자·당국별 열람 범위를 정의합니다. 이 단계에서 영업비밀에 해당하는 항목을 걸러내지 않으면 공개 범위를 되돌리기 어려워집니다. 제품 데이터를 가상 모델로 관리하는 체계를 이미 갖춘 기업이라면 그 자산을 여권 데이터와 연결하는 방안도 함께 검토할수 있습니다.

FAQ

EU에 직접 수출하지 않으면 디지털 제품 여권과 무관한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EU로 수출하는 국내 기업에 부품이나 소재를 공급한다면, 그 고객사가 여권에 담을 데이터를 요구하게 됩니다. 실제로 완성품 기업이 협력사에 소재 이력과 탄소발자국 자료를 요청하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규제 대상 여부보다 공급망 내 위치를 기준으로 판단하시는 편이 정확합니다.
QR코드만 붙이면 대응이 끝나나요? QR코드는 데이터로 가는 입구일 뿐입니다. 실제 부담은 그 뒤에 연결될 데이터를 모으고, 산정 방법을 정하고, 검증받는 과정에 있습니다. 소재 성분이나 재활용 원료 비율처럼 협력사에 의존하는 항목이 특히 오래 걸립니다. 캐리어 선택은 마지막 단계에 가까운 작업입니다.
표준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는데 지금 시작해도 낭비 아닌가요? 데이터 수집은 표준과 무관하게 필요합니다. 어떤 형식으로 표현하느냐가 표준의 영역이고, 무엇을 모으느냐는 규정이 이미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만 특정 솔루션에 데이터를 종속시키지 않도록 내보내기 가능한 형태로 보관하시는 것이 안전합니다.
중소기업도 같은 수준으로 대응해야 하나요? 규정상 요구 수준이 기업 규모에 따라 완화되는 부분이 있지만, 공급망을 통한 요구는 규모와 무관하게 전달됩니다. 현실적인 접근은 전체 시스템을 한 번에 구축하기보다, 주력 수출 품목 한두 개를 골라 데이터 항목을 채워보는 파일럿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데이터가 병목인지 드러납니다.
영업비밀이 노출될 위험은 없나요? DPP는 모든 정보를 전면 공개하는 구조가 아니라 이용 주체별로 열람 범위를 차등하는 구조로 설계되고 있습니다. 다만 그 범위를 기업이 설계 단계에서 정의해야 하므로, 공개 항목과 제한 항목을 미리 구분해두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정밀 배합비처럼 민감한 정보는 대체 지표로 표현할 수 있는지 검토하시는 것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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